최근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최아무개(25)씨가 이별을 통보한 전 연인을 살해한 ‘교제살인’이 또 발생했다. 교제살인이나 교제폭력 사건이 해마다 늘고 있지만 혼인·혈연관계 이외의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IPV·Intimate Partner Violence)’에 대한 법·제도적 대응은 사각지대에 있어, 이를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친밀 관계 폭력이란 여성 피해자가 다수인 젠더폭력의 대표적 유형으로, 과거 또는 현재 배우자나 연인 등 친밀한 사람의 신체적·성적·정신적 폭력 행위를 의미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친밀 관계 폭력을 규율하는 법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다. 가정폭력처벌법은 결혼(사실혼 포함) 배우자나 친족 등 가정구성원 폭력이 규율 대상이다. 스토킹처벌법은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는 상관없이 스토킹 행위(상대방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등으로 규정)가 있었는지를 따져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호를 한다. 이런 까닭에 가정폭력에 속하지 않거나 스토킹 피해 입증이 어려운 교제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1일 경남 거제 집에서 자고 있던 여성이 현관 비밀번호를 파악해 무단 침입한 가해자(전 연인)에게 폭행당해 전치 6주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 중 급작스럽게 상태가 악화해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겨레가 피해자 유족 법률대리인·경찰 등을 취재한 결과, 숨진 피해자와 가해자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 권인숙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최근 1년 이내 ‘거제 교제폭력 사망사건 112신고 내역’을 보면 두 사람은 2023년 6월부터 사건 당일인 지난 4월1일까지 모두 8차례 폭행(상호폭행 등 포함) 피해가 있었다며 112 신고를 했다. 숨진 피해자는 지난해 7월 가해자가 술을 마신 후 행인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말리다 폭행을 당했다며 112신고를 하면서 위급할 때 경찰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았다. 최근 1년 사이 두 사람 간 관계에서 폭력이 지속 발생했으나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에 규정된 피해 예방 조처는 없었다. 만약 스토킹처벌법이 적용됐다면 피해자에 대한 접근금지(긴급응급조치)나 가해자에 대한 유치장 구금을 비롯한 잠정조치, 피해자 보호시설 인도 등이 가능했을 수 있다.

경찰은 112 신고에서 스토킹 피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권유진 경남경찰청 여성청소년범죄수사대장은 “서로 약속을 잡아 만났으면 ‘상대방 의사에 반해 지속적으로’라는 스토킹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 및 법률대리인은 피해자가 숨진 뒤 범죄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지난달 16일 상해치사 협의로 입건된 가해자에 대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전문가들은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혼인·혈연 중심의 현행법이 규율하지 못하는 친밀 관계 폭력 사각지대가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이 아닌 친밀한 관계라는 점에서 피해자 스스로가 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친밀 관계 폭력 특성을 반영한 법·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정 유지에 방점이 찍혀 있어 가족구성원의 인권과 안전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규율 대상에 교제폭력을 포함하는 방식 등을 통해 시급히 (교제폭력에 대한) 입법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