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20대 남성이 전 연인을 살해한 ‘교제살인’이 발생하자, 일부 언론은 가해자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의대생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한편 ‘평범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는 등의 주변 평판을 전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성차별 구조에서 발생하는 여성 대상 폭력(젠더폭력)의 대표적 유형인 교제살인 가해자에 대한 좋은 평판을 부각하는 건 누구나 젠더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보단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가해자가 의대생이라는 등의 신상 정보보단 국가가 왜 피해자 보호에 계속 실패하는지 같은 구조적 원인 규명에 언론이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은 8일 교제살인 사건을 다루며, 가해자가 학창시절 ‘평범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거나 ‘교제 과정에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같은 지인들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가 지난해 4월 발간한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를 보면 “언론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가해자 일상이나 주변 반응을 보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럴 사람이 아니라거나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등의 말도 불필요하게 보도하는 경우가 있다”고 짚었다. 특히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 사건’ 주범인 조주빈에 대해 ‘조용한 성격의 평범한 대학생’, ‘학점 높은 우등생’이었다는 평판을 담은 보도를 짚으며 “사건 본질과 관계없는 가해자 업적을 보도하지 않는 건 중요한 2차 피해 방지 원칙”이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가해자 신상에만 집중하고, 지인들의 평판을 고스란히 전하는 보도는 젠더폭력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은 9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의대생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건 (이런 지위의 사람은) 젠더폭력 가해자가 될 리 없다는 통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가해자에 대한 좋은 평판을 부각시키는 것도 그 사람의 ‘의외성’에 주목하게 하여 일상다반사로 발생하는 젠더폭력이 사회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축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수정 한국여성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젠더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는지, 국가가 피해자 보호에 왜 계속 실패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년 여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여성 3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의 여성폭력(피해자가 생물학·사회적으로 여성이며, 성별 위계가 작용한 폭력)을 경험했다. 여성폭력 피해자 46.0%는 과거 또는 현재 배우자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 가해자라고 답했다.

오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