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문장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단어를 보는 것 같아요.”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er·ABT) 수석 무용수 서희(38)는 15년 동안 줄기차게 해온 줄리엣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이유를 “장면 장면을 연기하면서 관객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린 간담회 자리였다. 그는 세계 정상급인 이 발레단의 동양인 최초 수석 무용수다.

줄리엣은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배역이다. 2005년 입단한 서희는 2009년 이 역할로 주역에 발탁됐다. 솔로를 추지 않는 군무(코르 드 발레) 시절이라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2010년 솔리스트로 승급했고, 2년 뒤엔 수석 무용수에도 오를 수 있었다. “처음 줄리엣을 연기할 땐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매년 공연을 하면 할수록 질문이 더 많아지는 역할이더군요.”

유니버설발레단이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10~12일)에 올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가 줄리엣을 연기한다. 한국 관객에겐 처음 선보이는 줄리엣 역할이다.

그에겐 2013년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 이후 11년 만의 국내 무대다. 이번 작품에서 순수한 14살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줄리엣의 심리적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핵심 관람 포인트는 2막에 펼치는 발코니 파드되(2인무).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 사랑이 움트는 장면이다. “발코니 파드되를 추는 순간엔 속세를 내려놓고 16세기로 들어간 느낌이 들어요.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해요. 음악과 안무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어우러지죠.” 서희는 “첫사랑이란 단어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데, 그래서 제겐 가장 어려운 장면이자 좋아하는 장면”이라며 웃었다.


이번 작품은 1984년 국내 최초로 출범한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돌 기념 공연이다. 지난해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은 이 무용단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솔리스트 이유림이 서희와 줄리엣을 나눠 맡는다. 문훈숙 단장은 “서희와 강미선이 성숙하고도 노련한 줄리엣이라면 이유림은 풋풋한 줄리엣”이라고 표현했다. 강미선은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게 새로운 도전 과제”라고 했다. 이유림은 “줄리엣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무대를 거의 떠나지 않는 3막이 가장 어렵다”며 “극이 진행될수록 고조되는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